제임스 캘러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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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캘러헌은 1912년에 태어나 2005년에 사망한 영국의 정치인이다. 그는 영국 해군에서 복무한 유일한 총리이자, 재무 장관, 내무 장관, 외무 장관을 모두 역임한 최초의 인물이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총리직을 수행했으며, 재임 기간 동안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에 직면했다. 그는 1978년 조기 총선 대신 선거 연기를 결정하여 비판을 받았고, 1979년 불신임 투표로 인해 총선에서 패배했다. 퇴임 후에는 상원 의원으로 활동하며 국제 평화 운동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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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캘러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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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레너드 제임스 캘러헌, 카디프 남작 캘러헌 |
로마자 표기 | Leonard James Callaghan, Baron Callaghan of Cardiff |
출생일 | 1912년 3월 27일 |
출생지 | 영국, 햄프셔 주, 포츠머스 |
사망일 | 2005년 3월 26일 |
사망지 | 영국, 이스트서식스 주, 링머 |
정당 | 노동당 |
배우자 | 오드리 몰턴 (1938년 7월 28일 결혼, 2005년 3월 15일 사별) |
자녀 | 3명 (마거릿 제이 포함) |
교육 | 포츠머스 북부 중등학교 |
![]() | |
소속 | 영국 해군 |
계급 | 해군 중위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작위 및 훈장 | |
작위 | 남그래모건 주 카디프 시의 카디프 남작 |
훈장 | 가터 훈작사(KG), 추밀원 고문관(PC) |
명예 학위 | 서식스 대학교 법학 박사,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법학 박사 |
총리 | |
직책 | 영국 총리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임기 시작 | 1976년 4월 5일 |
임기 종료 | 1979년 5월 4일 |
이전 총리 | 해럴드 윌슨 |
다음 총리 | 마거릿 대처 |
야당 대표 | |
직책 | 영국 야당 대표 |
군주 | 엘리자베스 2세 |
총리 | 마거릿 대처 |
임기 시작 | 1979년 5월 4일 |
임기 종료 | 1980년 11월 10일 |
이전 대표 | 마거릿 대처 |
다음 대표 | 마이클 푸트 |
노동당 대표 | |
직책 | 노동당 대표 |
부대표 | 마이클 푸트 |
임기 시작 | 1976년 4월 5일 |
임기 종료 | 1980년 11월 10일 |
이전 대표 | 해럴드 윌슨 |
다음 대표 | 마이클 푸트 |
외무장관 | |
직책 | 외무장관 |
총리 | 해럴드 윌슨 |
임기 시작 | 1974년 3월 5일 |
임기 종료 | 1976년 4월 8일 |
이전 외무장관 | 알렉 더글러스흄 |
다음 외무장관 | 앤서니 크로슬랜드 |
내무장관 | |
직책 | 내무장관 |
총리 | 해럴드 윌슨 |
임기 시작 | 1967년 11월 30일 |
임기 종료 | 1970년 6월 19일 |
이전 내무장관 | 로이 젠킨스 |
다음 내무장관 | 레지널드 모들링 |
재무장관 | |
직책 | 재무장관 |
총리 | 해럴드 윌슨 |
임기 시작 | 1964년 10월 16일 |
임기 종료 | 1967년 11월 30일 |
이전 재무장관 | 레지널드 모들링 |
다음 재무장관 | 로이 젠킨스 |
그림자 내각 | |
그림자 장관 | 직책: 그림자 내무장관 임기: 1970년–1971년 직책: 그림자 고용부 장관 임기: 1971년–1972년 직책: 그림자 외무영연방장관 임기: 1972년–1974년 |
그림자 재무장관 | 임기 시작: 1961년 11월 2일 임기 종료: 1964년 10월 16일 이전 재무장관: 해럴드 윌슨 다음 재무장관: 레지널드 모들링 당대표: 휴 게이츠켈 조지 브라운 (임시) 해럴드 윌슨 |
하위 장관 직책 | |
직책 | 직책: 교통부 의회 담당 차관 임기: 1947년–1950년 직책: 해군성 의회 및 재무 차관 임기: 1950년–1951년 |
의회 직책 | |
직책 | 상원 의원 |
신분 | 세속 귀족 |
임기 | 종신 |
임기 시작 | 1987년 11월 5일 |
임기 종료 | 2005년 3월 26일 |
직책 | 하원 의원 |
임기 시작 | 1983년 6월 9일 |
임기 종료 | 1987년 5월 18일 |
이전 하원 의원 | 존 파커 |
다음 하원 의원 | 버나드 브레인 |
의회 | 영국 |
선거구 | 카디프 남부 및 페나스 |
이전 선거구 | 카디프 남동부 (1950년–1983년) 카디프 남부 (1945년–1950년) |
임기 시작 | 1945년 7월 5일 |
임기 종료 | 1987년 5월 18일 |
이전 의원 | 아서 에반스 |
다음 의원 | 앨런 마이클 |
2. 어린 시절과 경력 (1912 ~ 1944)
캘러헌은 잉글랜드 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태어나 포츠머스 노던 중등 학교(Mayfield School, Portsmouth)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시니어 옥스퍼드 시험에 합격했으나, 대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62]
17세에 내국세 세입청에서 세금 조사원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켄트주 내국세 세입청 사무소에 있는 동안 1931년 노동당 메이드스톤 지부에 가입하였다. 1934년 런던으로 옮겨 세입청에서 근무하였다. 1937년 노동조합 합병 후 캘러헌은 전임 노조 관계자로 임명되어 내국세 세입청 간부 연맹의 보조 서기로 활동했다.[62] 이 과정에서 캘러헌은 런던 경제 대학의 해럴드 래스키와 교류하며 영국 국회 진출에 대한 격려를 받았다.
1943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중위 계급으로 복무했다.[62] 승진 훈련 중 결핵 진단을 받고 포츠머스 근처 고스포트에 있는 해즐라 병원에 입원했다. 회복 후 퇴원하여 화이트홀에 있는 해군 본부에서 일본군 관련 업무를 담당했으며, 영국 해군을 위한 "적국 일본" 제목의 복무 설명서를 썼다.[62]
1945년 인도양에서 HMS 엘리자베스 호에 근무했다.[62] 유럽 전승 기념일 이후 총선 출마를 위해 잉글랜드로 귀국했다.[62] 휴가 중 캘러헌은 카디프 사우스를 위한 국회 의원 후보로 선발되었다.
2. 1. 출생과 가정 환경
레너드 제임스 캘러헌(1912년 3월 27일 ~ 2005년 3월 26일)은 1912년 3월 27일 잉글랜드 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태어났다.[2] 그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 잉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 출신의 영국 해군 상급 부사관 제임스 캘러헌 1세(1877~1921)였으며,[2] 어머니는 침례교 신자인 샬럿 캘러헌(1879~1961)이었다.[2] 당시 가톨릭 교회는 가톨릭 신자와 다른 종파 신자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임스 캘러헌 1세는 가톨릭을 버리고 침례교 예배당에서 샬럿과 결혼했다.[2]캘러헌의 아버지는 1890년대에 집을 떠나 영국 해군에 입대했는데, 입대 연령에 미달했기 때문에 허위 생년월일을 기재하고 가로거(Garogher)라는 성을 캘러헌(Callaghan)으로 바꾸어 신원을 감추었다. 그는 상급 하사관(Chief Petty Officer)까지 승진했다.[2]
제임스 캘러헌 1세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함 HMS ''아긴코트''에서 복무했다.[3] 1919년 제대 후 영국 해안경비대(Her Majesty's Coastguard)에 합류하여 가족과 함께 데번주(Devon) 브릭섬(Brixham)으로 이주했지만,[3] 1921년 44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가족은 빈곤에 몰리고 구호에 의존해야 했다.[3] 1924년 제1차 노동당 정부가 출범하여 남편의 사망이 전쟁 복무와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캘러헌 부인에게 주당 10실링의 과부 연금이 지급되면서 재정 상황이 개선되었다.[3][4]
캘러헌에게는 누나 도로시 거트루드 캘러헌(1904~1982)이 있었다.[2] 어린 시절 캘러헌은 레오나드(Leonard)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1945년 정계에 입문하면서 제임스(James)라는 중간 이름을 사용하기로 결정했고, 그 후 제임스 또는 짐(Jim)으로 불렸다.[3]
2. 2. 학창 시절과 초기 경력
잉글랜드 햄프셔주 포츠머스에서 태어난 캘러헌은 포츠머스 노던 중등 학교(Mayfield School, Portsmouth)에서 수학하였다. 1929년 시니어 옥스퍼드 시험에 합격했으나, 대학교 진학 대신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62]17세에 내국세 세입청에서 세금 조사원으로 근무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켄트주 내국세 세입청 사무소에 있는 동안 1931년 노동당 메이드스톤 지부에 가입하였다. 1934년 런던으로 옮겨 세입청에서 근무하였다. 1937년 노동조합 합병 후 캘러헌은 전임 노조 관계자로 임명되어 내국세 세입청 간부 연맹의 보조 서기로 활동했다.[62]
2. 3.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3년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중위 계급으로 복무했다.[62] 승진 훈련 중 건강 검진에서 결핵 진단을 받고 포츠머스 근처 고스포트에 있는 해즐라 병원에 입원했다. 회복 후 퇴원하여 화이트홀에 있는 해군 본부에서 일본군 관련 업무를 담당했으며, 영국 해군을 위한 "적국 일본" 제목의 복무 설명서를 썼다.[62]1945년 인도양에서 HMS 엘리자베스 호에 근무했다.[62] 유럽 전승 기념일 이후 총선 출마를 위해 잉글랜드로 귀국했다.[62]
3. 국회와 내각 (1945 ~ 1976)
1945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리가 되었고, 캘러헌은 카디프 사우스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영국 교통부와 해군성에서 경력을 쌓은 후, 1951년부터 1964년까지 야당 의원으로서 그림자 내각에서 활동하며 경찰 연맹의 국회 조언자로도 일했다. 1960년 당 부대표직에 도전했으나 조지 브라운에게 패배했고, 1961년에는 그림자 재무장관이 되었다. 1963년 휴 게이츠컬 당수 사망 후 당수직에 도전했지만 3위에 그쳤다.
1964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캘러헌은 해럴드 윌슨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높은 인플레이션, 실업률, 예산 적자 등 경제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파운드 스털링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1967년 평가 절하를 단행해야 했다. 이후 캘러헌은 내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내무장관 시절, 캘러헌은 북아일랜드 문제에 직면하여 영국군을 배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또한 1968년 영연방 이민법을 제정하여 영국과 "실질적인 관계"가 없는 영국 여권 소지자들의 입국을 제한했고, 같은 해 인종관계법을 통과시켜 인종 차별을 금지했다. 1969년에는 노동조합 개혁에 반대하여 내각 내 갈등을 겪기도 했다.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 캘러헌은 다시 야당 의원으로 돌아가 그림자 내무장관, 외무·연방 장관을 역임했다. 1974년 해럴드 윌슨이 다시 총리가 되자, 캘러헌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서 영국의 회원 자격 조건을 재협상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1975년 국민 투표에서 EEC 잔류를 지지했다.
3. 1. 정계 입문 (1945)
1945년 영국 총선에서 노동당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리가 되었다. 캘러헌은 카디프 사우스 선거구에서 보수당 후보 아서 에번스 경을 6,000표 차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는 군대의 신속한 복원과 새로운 주택 건설 프로그램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12] 선거 당시 그의 아들 마이클이 태어났다.3. 2. 교통부 및 해군성 경력 (1947 ~ 1951)
1947년 영국 교통부 정무차관으로 임명되어 아서 영 경의 조언을 받아 횡단 보도 도입, 야간 반사경 사용 확대 등 도로 안전을 크게 개선했다.[2] 1950년에는 해군성 정무차관 및 재정차관으로 자리를 옮겨 유럽 평의회 대표로 활동하면서 유럽 군대 창설 계획에는 반대했다.[2]3. 3. 야당 시절 (1951 ~ 1964)
캘러헌은 노동당 의원들과 인기가 있었고, 1951년부터 1964년까지 노동당이 야당이었던 동안 매년 그림자 내각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경찰 급료에서 인상을 협상한 경찰 연맹에 국회 조언자였다.[62] 1960년 비핵화에 반대하며 당의 부대표 선거에 출마했으나, 노동당 우익의 다른 후보 조지 브라운과의 경쟁에서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하였다. 1961년 캘러헌은 그림자 재무장관이 되었다.[62] 1963년 1월 휴 게이츠컬이 사망하자, 캘러헌은 당수직에 도전했으나 3위에 그쳤다. 어려운 리더십 선거에서 지도자로서 해럴드 윌슨을 막기를 원하였으나 또한 조지 브라운을 신임하지 않았던 앤서니 크로스랜드 같은 우파들의 성원을 자신이 얻었어도, 캘러헌이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62]3. 4. 재무 장관 (1964 ~ 1967)
1964년 10월 보수당 총리 앨릭 더글러스흄 경이 총선을 불렀다. 노동당은 56석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하였다. 해럴드 윌슨 아래 새 노동당 정부는 즉시 경제 문제에 직면했고, 윌슨은 캘러헌을 재무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새 정부는 지불 균형의 적자와 파운드 스털링에 대한 투기적 공격을 극복해야 했다. 캘러헌을 포함한 내각은 평가 절하가 가능하면 장기적으로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는 다른 중앙 은행들에서 대출을 주선하고 경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일부 세금 인상을 단행했다. 재무 장관으로서 캘러헌의 재임 기간은 높은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예산 적자, 수출입 균형의 적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파운드 스털링의 가치에 대한 논쟁과 함께 위기의 시간 동안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1964년 11월 11일 캘러헌은 첫 예산을 발표하고 소득세, 휘발유 세금 인상과 새로운 양도소득세 도입을 선언했는데, 이는 국제 은행가들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균형과 통화의 적자에서 열을 빼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 조치였다. 경제와 증가하는 어려움들은 이전 정부 아래 수입품들의 부가 요금이 하루에 5천만 파운드 만큼 많은 가격에 의하여 고갈되는 데 준비금을 강요했을 때 분명하였다. 11월 23일 이자율을 2%에서 7%로 인상하기로 결정했고, 이는 많은 비판을 야기했다.[62] 위기 관리는 새로운 노동당 정부의 국고 정책을 반대한 잉글랜드 은행 총재 크로머 경의 태도 때문에 더욱 어려워졌다. 캘러헌과 윌슨이 새로운 총선을 치르겠다고 위협하자 총재는 준비금과 적자를 안정시키기 위해 곧 3억 파운드 대출을 늘렸다.[62] 1965년 4월 6일에 발표된 그의 두 번째 예산에서는 경제를 수축시키고 2억 5천만 파운드에 의해 수입품의 수요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선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자율은 7%에서 6%로 축소되었다. 경제와 영국의 금융 시장이 안정된 잠시의 시간을 위하여 6월을 위하여 캘러헌이 미국을 방문하여 린든 B. 존슨 대통령과 국제 통화 기금과 영국의 경제 상태를 논의하는 데 허용되었다.
1965년 7월, 파운드 스털링은 극심한 압박을 받았고 캘러헌은 경제 관리를 증명하기 위해 엄격한 임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여기에는 모든 현재 정부 건설 계획을 중단하고 새로운 연금 계획을 연기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 중 하나는 파운드 스털링을 뜨게 하거나 평가 절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캘러헌과 윌슨은 파운드화 평가 절하가 새로운 사회적, 경제적 문제를 야기할 것이라고 다시 단호하게 주장했고, 지속적으로 그것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정부는 경제와 1966년까지 하나로 축소되어 온 날씬한 대다수 둘다와 함께 지속적으로 분투하였다. 1966년 2월 28일, 윌슨 총리는 공식적으로 3월 31일에 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3월 1일, 캘러헌은 하원 의원들에게 "적은 예산"을 제시하고 영국이 십진법을 채택할 역사적인 결정을 발표했다. 그는 또한 경제적 어려움의 표면에 저당 계획을 유지하는 데 저임금 소득자들을 허용한 단기간 저당 계획을 선언하기도 하였다. 노동당이 보수당에 363석 대 252석으로 승리하여 노동당 정부에 97석의 큰 다수를 안겨준 직후였다.
1966년 5월 4일 캘러헌은 새 예산을 발표했다. 그는 자신이 선거에 대비하여 자신의 "적은 예산" 연설을 할 때 자신이 영국 하원으로 전체 예산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원에 알렸다. 그의 예산의 주요 요점은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에 전념하는 선택적인 고용 관련 세금의 도입이었다. 예산이 있은 지 12일 후, 국내 선원 연합은 국내 파업과 증가된 파운드 스털링을 향한 문제들을 불렀다. 추가적인 파업들은 증가하는 데 지불 적자의 균형과 이제 마감된 3천 3백만 파운드의 대출을 일으켰다. 7월 14일, 이자율은 다시 7%로 인상되었다. 7월 20일, 캘러헌은 임금에 6개월 동결과 월급 인상들과 함께 긴급 10 포인트 프로그램을 선언하였다. 1967년까지 경제는 다시 한번 안정되기 시작했고, 이자율은 3월에 6%, 5월에 5.5%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경제는 곧 석유 가격 인상의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중동 위기와 함께 다시 한번 혼란에 빠졌다.[62] 더욱이 경제는 국내 부두 파업이 8주간 지속되었을 때 9월 중순에 타격을 입었다. 파운드 스털링의 실행은 6일 전쟁과 수에즈 운하의 폐쇄와 부두 파업과 함께 시작되었고, 지불 적자의 균형은 위기의 수준으로 자라났다. 공동 시작의 보고는 파운드 스털링이 준비 화폐로서 지속될 수 없었다는 것을 제안하였고, 그것은 다시 파운드 스털링이 평가 절하되어야 했다는 것이 제안되었다. 캘러헌은 몇몇의 조건들이 첨부되었기 때문에 국제 통화 기금으로부터 제공된 우발 기금을 거부하였고, 11월 15일 수요일 역사적 결정은 14.3 퍼센트 절하로 정부를 저지르기 위하여 찍어졌다. 상황은 당시 거대한 정치적 논쟁이었다.
캘러헌은 즉시 재무 장관직 사임을 제안했고, 증가하는 정치적 반대는 윌슨이 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62] 윌슨은 로이 젱킨스를 내무 장관에서 재무 장관으로 옮겼고, 캘러헌은 1967년 11월 30일 새로운 내무 장관이 되었다.
3. 5. 내무 장관 (1967 ~ 1970)
1967년 11월 캘러헌은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62] 내무 장관으로서 캘러헌은 북아일랜드에서 새로운 갈등을 겪었다. 그는 북아일랜드의 얼스터 연합당 정부의 요청을 받고 북아일랜드에 영국군을 배치하는 결정을 내렸다.캘러헌은 케냐 출신 아시아인들의 유입이 곧 국가에 몰려들 것이라는 보수당의 주장에 자극받아 1968년 이민 법령을 제정했다. 이 법령은 영국과 "실질적 연결이 없던" 영국 여권 소지자들에 대한 입국 통제를 강화했다.
같은 해, 캘러헌은 인종 관계 법령을 통과시켜 민족 배경을 이유로 고용, 주택 공급, 교육을 거부하는 것을 불법으로 만들었다.[15] 이 법령은 차별과 불공정한 대우에 대한 고충을 처리하는 인종 관계 위원회의 권한을 확대했다. 또한 "조화로운 공동체 관계"를 증진하기 위한 새로운 감독 기관인 공동체 관계 위원회를 설립했다. 캘러헌은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면서 "하원은 우리 국가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더욱 거대한 사회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를 드물게 다루었다"고 말했다.
1969년, 캘러헌은 노동 조합 운동에서의 배경을 바탕으로, 내각 동료 바버라 캐슬이 제안한 근로 계약법에 반대했다. 그는 노동 조합을 개혁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며 노동자 계급을 상징하는 "천 모자의 보호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분쟁에서 캘러헌은 최종적으로 승리했고, 제안들은 철회되었다. 당 내에서 윌슨을 싫어했던 일부는 캘러헌을 지지하여 윌슨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캘러헌으로 대체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3. 6. 야당 시절 (1970 ~ 1974)
1970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패배한 후, 캘러헌은 1971년까지 그림자 내무장관, 1972년부터 1974년까지 그림자 외무·연방 장관을 역임했다.[62] 그는 1972년 당 지도부와 상의 없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 가입에 반대하는 개인적인 입장을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3. 7. 외무 장관 (1974 ~ 1976)
1974년 3월 해럴드 윌슨이 다시 총리로 임명되면서 캘러헌을 외무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서 영국의 회원 자격 조건을 재협상하는 책임을 맡았다.[15] 회담이 끝날 무렵, 캘러헌은 새로운 조건이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선언하면서 내각을 이끌었고, 1975년 국민 투표에서 "찬성" 투표를 지지했다.[15]1976년 3월 16일 윌슨 수상이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한 직후, 캘러헌은 로드지아의 스미스 정권에게 흑인 다수 통치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며, 아프리카의 백인 독재 정권에 종언을 고하는 계기를 만들었다.[63]
4. 총리 재임 (1976 ~ 1979)
캘러헌은 재무 장관, 내무 장관, 외무 장관의 3개 내각 직위를 모두 보유한 첫 총리였다.
1976년 보궐선거 패배와 분당 사태로 노동당은 하원 과반수를 상실했다. 이에 캘러헌은 자유민주당 등 소수 정당과의 협력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야 했다. 1960년대에 이에인 매클로드가 그늘의 장관이었을 때 매클로드와 좋은 인간 관계를 매우 즐겼지만, 하원에서 충돌하였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자치 요구에 직면하여 지방분권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스코틀랜드 자치안은 부결되었다.
그해 3월 캘러헌은 논쟁과 족벌주의의 비난에 연루되었다. 저명한 저널리스트나 외교에서 아무 특이한 배경이 없던 그의 처자 피터 제이는 미국 주재 영국 대사로 임명되었다. 캘러헌 정부는 또한 소련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해리어 전투기들을 파는 데 결정하였다.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과 캘러헌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미국이 중국에 군용 장비를 팔지 않겠다는 것을 소련에 맹세하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서방 국가들의 무기 거래를 막지는 않았다.[35]
1978년 가을까지 대부분의 여론 조사는 노동당이 앞서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캘러헌은 총선을 통해 재집권 할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기로한 그의 결정은 그의 총리직의 가장 큰 실수로 묘사된다. 1978년 9월 초순, 그는 방송을 통해 총선 실시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당시 그의 결정은 정치적 상황을 자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으로 여겨졌고, 그는 그달의 조합 회의에서 "Waiting at the Church"를 부른 옛날 뮤직홀 스타 마리 로이드를 흉내 내면서 자신의 상대들을 조롱하였다. 캘러헌은 자신이 선거를 약속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그가 선거를 시행할 것이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했고, 보수당은 이에 대비하지 못했다.
캘러헌은 장기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4년 동안 급여 제한 정책을 운영해 왔고, 이는 합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5년째가 되면 경제가 더욱 향상될 것이고 1979년 자신이 재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임금 인상을 5% 이하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 조합들은 급여 제한을 거부하였고, 1978년 ~ 1979년 파업을 통해 더 높은 임금을 얻어냈다.
4. 1. 총리 취임 (1976)
1976년 3월 16일 해럴드 윌슨 수상이 갑작스럽게 사임을 발표했다.[63] 그해 3월 23일에는 로드지아의 스미스 정권에 대해 흑인 다수 통치로 이행할 것을 요구하며, 아프리카의 백인 독재 정권이 종언을 고하는 계기를 만들었다.[63] 이후 치러진 1976년 영국 노동당 당수 선거에는 캘러헌을 포함한 6명이 출마하여 접전이 벌어졌고, 2차 투표 및 결선 투표를 거쳐 4월 5일에 캘러헌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캘러헌은 재무 장관, 내무 장관, 외무 장관을 모두 역임한 최초의 총리였다.4. 2. 경제 위기 대응
총리로서 캘러헌의 재임 기간은 하원에서 소수당으로 정부를 운영해야 하는 위기 상황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생존을 위해 자유민주당-노동당 협정을 포함, 소수 정당들과 협력해야 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자치권 이양에 대한 국민투표를 수용해야만 했다.장기적인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해 캘러헌은 4년간 임금 인상 억제 정책을 시행했고, 이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5년 차에는 경제가 더욱 개선되어 1979년 재선될 수 있다고 판단, 임금 인상률을 5% 이하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이를 거부했고, 1978년~1979년 겨울, 파업을 통해 더 높은 임금 인상을 얻어냈다. 이러한 산업 불안은 캘러헌 정부의 인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1979년 초, 과들루프에서 열린 경제 정상 회담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캘러헌은 "현재 영국 내 혼란에 대한 당신의 일반적인 견해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글쎄요, 그건 당신이 내린 판단입니다. 저는 만약 당신이 외부에서 상황을 본다면, 그리고 아마도 지금 당신이 다소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 다른 사람들이 영국에 혼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라고 답했다. 이 발언은 더 선에 "위기? 무슨 위기?"(Crisis? What Crisis?)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1979년 3월 28일[64], 하원은 단 한 표 차이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고, 캘러헌은 여왕에게 총선 실시를 건의해야 했다.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은 "노동은 효과가 없다(Labour Isn't Working)"라는 슬로건으로 선거 운동을 펼쳤고, 결국 43석의 과반수를 확보하며 승리했다.[29][30][31]
4. 3. 소수 정부 운영의 어려움
1976년 보궐선거 패배와 분당 사태로 노동당은 하원 과반수를 상실했다. 이에 캘러헌은 자유민주당 등 소수 정당과의 협력을 통해 정국을 운영해야 했다.[64]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자치 요구에 직면하여 지방분권 국민투표를 실시했으나, 스코틀랜드 자치안은 부결되었다.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 국민당(SNP)의 지지가 철회되었고, 1979년 3월 28일 불신임 결의가 311대 310, 단 한 표 차이로 가결되면서 캘러헌은 총선을 실시해야 했다.[64]4. 4. 정책
캘러헌 정부는 1974년부터 추진해 온 사회 계약 정책(임금 억제, 사회 복지 확대)을 유지하려 했으나, 경제 위기로 어려움을 겪었다. 1976년 인종 관계 법을 제정하여 인종 평등 위원회를 설치하고 인종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 산업과 항공 산업을 국유화하여 영국 조선(British Shipbuilders)과 영국 항공우주(British Aerospace)를 설립했다.1976년, 러스킨 대학 연설에서 교육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대토론'을 시작하여 국가 교육 과정 도입의 계기를 마련했다.
총리 재임 초기, 사위인 피터 제이를 미국 주재 영국 대사로 임명하여 논란을 일으켰다.[35]
4. 5. 1978년 총선 불발 논란
1978년 가을까지 대부분의 여론 조사에서는 노동당이 앞서고 있었고, 캘러헌이 조기 총선을 통해 재집권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64] 그러나 캘러헌은 1978년 9월, 총선을 연기한다고 발표하여 정치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당시 조합 회의에서 "Waiting at the Church"를 부른 옛날 뮤직홀 스타 마리 로이드를 가장하면서 자신의 상대들을 조소하였다. 이는 현대 영국 정치에서 거만의 순간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축제 분위기였다. 캘러헌은 자신이 선거를 약속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선거를 ঘোষণা할 것이라는 역설로 잘못 해석했고, 보수당은 이에 대비하지 못했다.[64]캘러헌의 총선 연기 결정은 정치적 오판으로 평가되며, 이후 보수당의 장기 집권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적인 경제적 어려움과 1978년 ~ 1979년 겨울 동안의 파업으로 인한 산업 불안은 그의 정부를 인기 없게 만들었다. 1979년 초 과들루프에서 열린 경제 정상 회의에서 귀국한 캘러헌은 "현재 국가에서 장착 혼돈의 보기에 당신의 정통적인 접근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고, 이에 대해 "만약 당신이 외부로부터 그것을 본다면, 아마 당신은 지금 교구적 관점을 취하고 있으며, 나는 세계에서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장착 혼돈이 있다는 보기를 나눌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이 답변은 더 선에 "Crisis? What Crisis?" (위기? 무슨 위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64]
4. 6. 1979년 총선 패배
1978년 가을까지 대부분의 여론 조사는 노동당이 앞서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고, 캘러헌은 곧 선거를 시행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그의 총리직의 가장 큰 실수로 평가받는다.[64]1978년 9월 초, 캘러헌은 방송을 통해 선거를 발표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당시 캘러헌이 계속 집권하기로 결정한 것은 정치적 상황을 자신이 지배하고 있다는 상징으로 여겨졌고, 그는 그달의 조합 회의에서 "Waiting at the Church"를 부른 옛날 뮤직홀 스타 마리 로이드를 흉내 내면서 자신의 상대들을 조롱하였다. 이는 현재 영국의 근대 정치에서 오만한 순간 중 하나로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축제로 여겨졌다. 캘러헌은 자신이 선거를 약속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그의 메시지를 그가 선거를 시행할 것이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했고, 보수당원들은 선거에 대비하지 못했다.[64]
캘러헌은 장기적인 경제적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4년 동안 급여 제한 정책을 운영해 왔고, 이는 합리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5년째가 되면 경제가 더욱 향상될 것이고 1979년 자신이 재선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임금 인상을 5% 이하로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노동 조합들은 급여 제한을 거부하였고, 1978년 ~ 1979년 파업을 통해 더 높은 임금을 얻어냈다. 산업 불안은 캘러헌 정부의 인기를 크게 떨어뜨렸고, 인터뷰 질문에 대한 캘러헌의 응답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64] 1979년 초 과들루프에서 열린 경제 정상 회의에서 영국으로 돌아온 캘러헌은 "현재 국가에서 나타나고 있는 혼란에 대한 당신의 일반적인 접근 방식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캘러헌은 "글쎄요, 그것은 당신이 만드는 정의입니다. 만약 당신이 외부에서 그것을 본다면, 아마도 당신은 지금 다소 편협한 관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세계의 다른 사람들이 혼란이 심화되고 있다는 견해를 공유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이 답변은 더 선에 "Crisis? What Crisis?" (위기? 무슨 위기?)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64]
1979년 3월 28일, 하원은 단 한 표 차이로 불신임 결의를 통과시켰고, 캘러헌은 여왕에게 선거를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64] 사치 앤드 사치를 광고 자문으로 고용한 보수당은 "노동당은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으로 선거 운동을 벌였다. 결국 마거릿 대처가 이끄는 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하였다.[64]
5. 퇴임 이후 (1980 ~ 2005)
1980년 노동당 당 회의에서 개인 당원과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선거인단에 의한 선거라는 새로운 제도가 채택되자, 캘러헌은 그해 9월 노동당 당수직에서 사임했다. 그의 사임은 후임자가 의원들에 의해서만 선출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국회 노동당 내 깊은 분열을 드러낸 선거 운동의 2차 투표에서 마이클 푸트는 데니스 힐리를 꺾고 당수직을 승계했다.
1983년 캘러헌은 하원에서 가장 오랫동안 재직한 의원이자 1945년 선거의 유이한 생존자 중 한 명으로서 "하원의 최고참 의원"이 되었다. 1987년 가터 훈장을 받았으며, 42년간의 하원 의원 생활을 마감하고 1987년 총선에 불출마했다. 얼마 후, 사우스글러모건 주 카디프 시의 '''"카디프의 캘러헌 남작"'''으로 남작 작위를 받았다.[65]
1988년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의 전 의장(1969~1982)이었던 캘러헌의 부인 오드리 여사는 J. M. 배리가 병원에 기증한 피터 팬의 저작권이 만료될 예정임을 지적하는 편지를 신문에 기고했다. 캘러헌은 저작권을 영구적으로 연장하는 내용의 수정안을 상원에서 발의했고, 이는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2005년 2월 14일 해럴드 맥밀런을 제치고 역대 최장수 영국 총리가 되었으며, 93세 생일을 하루 앞둔 3월 26일 이스트서식스주 링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캘러헌은 92세 364일로 맥밀런보다 42일 더 오래 살았다. 캘러헌은 화장되었고, 그의 유해는 부인이 이사회를 지냈던 그레이트 오몬드 스트리트 병원 입구 근처 피터 팬 동상 아래에 뿌려졌다.
6. 사망
제임스 캘러헌은 2005년 3월 26일, 93세 생일을 하루 앞두고 이스트서식스주 링머의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61] 92세 364일을 살아 해럴드 맥밀런보다 42일 더 오래 살았으며, 역대 영국 총리 중 가장 장수했다. 유해는 화장 후 런던 그레이트 오먼드 스트리트 병원의 피터 팬 동상 주변에 안치되었다.[61]
7. 개인 생활
1938년 7월, 캘러헌은 둘 다 지방의 침례교회에서 주일 학교 교사로 일하며 만난 오드리 엘리자베스 멀튼과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었다.[66] 캘러헌의 흥미는 럭비, 테니스, 농업이었다. 그의 딸 마거릿은 패딩턴의 제이 남작 부인이 되었고,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영국 상원의 지도자였다.
자녀 정보는 다음과 같다.
이름 | 출생 | 비고 |
---|---|---|
마거릿 제이 (en:Margaret Ann) | 1939년 11월 18일 | 노동당 정치인, 왕실 인장 보관관과 상원 부원내총무 역임[62] |
줄리아 엘리자베스 | 1942년 | 이언 해밀턴 허버드와 1967년 결혼[62] |
마이클 제임스 | 1945년 | 제니퍼 메리 모리스와 1968년 결혼[62] |
8. 서훈
Baron Callaghan of Cardiff영어는 1987년 11월 5일 칙허장에 의해 서임된 영국의 종신귀족 작위이다. 정식 명칭은 '''남글라모건주 카디프 시 카디프의 캘러헌 남작'''Baron Callaghan of Cardiff, of the City of Cardiff in the County of South Glamorgan영어이다.
9. 평가
캘러헌은 노동조합 운동가 출신으로, 중도진보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총리 재임 기간 동안 '영국병'으로 불리는 경제 위기와 사회 불안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었다. 1978년 총선 연기 결정은 그의 정치 경력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인종 관계 법 제정, EEC 잔류 결정 등 사회 통합과 국제 협력에 기여한 업적도 남겼다. 대한민국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퇴임 후 국제 평화 운동에 참여하며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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